배신하지 않는 고난(苦難)
기독교에서 가장 큰 절기는
성탄절과 부활절이다.
부활절은 우리 문화(文化)에서는 생소하지만
서구에서는 부활절 방학과 휴가가
있을 정도로 큰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부활절을 맞이하려면
그 전에 40일 동안 주의 고난(苦難)을
기념하는 사순절(四旬節)이 있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진리를 놓치기가 쉽다.
사순절 없는 부활(復活)은 있을 수가 없다.
땀 흘리지 않고 열매를 거둘 수 없고
아픔 없이 성숙할 수 없듯이,
고난 없는 영광(榮光)은 기대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순절은 기독교에서만
지키는 절기가 아니라,
인생 속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으므로
근본적으로 고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인생에서 왜 고난이 필요(必要)한가.
또 그러한 결과로 어떤 영광이 나타나는가.
진부(陳腐)할 것 같은 이러한 주제지만
사순절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면 유익한 시간이 될 것이다.
사순절이란 열 순(旬)자를 써서
‘40일’이라는 뜻으로 바이블에서는
그 수가 고난과 갱신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모세는 40일 금식을 통해 십계명을 받았고,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했고,
주님은 40일을 금식(禁食)하셨고
또 부활에서 승천까지도 40일이 걸렸다.
기독교는 고난의 의미인 ‘40’을 빼 놓고는
생각할 수도 없듯이 우리네 인생도
고난을 빼 놓고는 내일의
꿈과 영광(榮光)이란 무지개에 불과하다.
어느 잡지 광고가 눈길을 끌었다.
정다빈양 죽기 전 힘들었던 삶,
은퇴설과 이혼설이 나도는 나훈아 씨,
선우혜경 씨의 뜻밖의 가정사 고백
...
한 결 같이 삶이 너무 고달파서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네 인생은 거친 파도를 헤치며
전진(前進)하는 조각배처럼
끊임없이 세파의 도전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 상황에서 완전(完全)한 자란 아무도 없다.
다만 아슬아슬하게 폭풍이 지나가길
바라며 기도(祈禱)할 뿐이다.
하루도 멈춘 적이 없는
앰블런스 사이렌 소리를 통해
내 이웃의 고난이 무엇인지를 깨우쳐 준다.
그러나...
의미 없는 아픔은 없듯이
고난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겨나갈 때 승리의 면류관이 기다린다는
확신이 있기에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정진하는 것이 인생이 아니겠는가.
고난은 분명 고통스럽지만
그것은 인생에서 꼭 필요한 이유는
첫째로 고난은 자신에 대해 눈을 뜨게 하기 때문이다.
냉동기술이 발달되지 않았을 때,
어부의 최대 관심사는 청어를 싱싱하게
운반하는 일이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런던에 도착해보면 다 죽어있었다.
그런데 한 어부는 산 채로 비싼 값에 팔아
큰 재미를 보았는데 알고 보니 메기를
청어 안에 넣어두면 죽지 않으려
열심히 도망 다닌 것이
싱싱한 고기가 되게 했던 비결이었다.
사람들은 편한 것을 좋아하지만
인생에서 고난과 긴장(緊張)감이 사라지면
그 때부터 삶의 백태가 끼기 시작하여
장래가 불투명하여 두려움 속에 부정적인 사람이 된다.
유안진님의 ‘내가 나의 감옥이다’
시를 보면 자신은 한 눈 팔고
사는 줄은 알았는데,
알고 보니 두 눈 다 팔았다는 것이다.
다른 것은 다 보면서 정작 무엇이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게 했단 말인가.
현대인들에겐 고난보다는 안락(安樂)이
더 큰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
지금 온난화 현상으로 동해안 생태계에
지각변동이 왔듯이 삶의 온난화는
고난의 한파보다 더 무서운 재앙이 되고 있다.
인간은 너무나 우매하여 고난이
아니고는 자기를 돌아볼 줄 모르기에,
신은 고난을 통해
자아를 바라보게 하므로
자연히 이웃과 신을 바라보게 하신다.
어떤 분은 사업이 부도나고 남편이 구속되고
가정이 파탄되면서 자신을 찾았다고
고백했듯이 어리석은 인간은
아픔을 통해서 비로써 자기를 성찰하기에
고난이 삶에 필요(必要)한 것이다.
둘째는 고난은 전진(前進)의 기회가 되기에 필요하다.
우리는 나이 마흔(40)이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을 한다.
그 나이에 얼굴이란
외모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삶
자체가 멋과 향을 풍기면서 얼굴을
만들어 주기에 책임(責任)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40’이란 숫자 자체가 고통이 아니라
그 때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장애물이 있었던가.
수많은 풍파와 폭풍(暴風)이 덮칠 때
자신은 죽어가면서 가정과
이웃은 사는 시간이 되었기에
40의 고난은 오히려 축복이 되었던 것이다.
아니 고요한 바다만 항해하는 배란
이제껏 만난 적이 없었다.
니체도 인생의 기쁨은 오히려
고난 속에 있다고 했듯이,
풍파들이 있었기에 전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보통 선수들이 큰 대회를 앞두고
40일 전지훈련을 갖는 데는
나름대로 과학적 근거(根據)가 충분하다.
이 기간에는 축적되었던 에너지를 다
방전시키고 다시 재충전 시키는데 훈련과정에서
에너지가 연소되면서 생겨나는 고난 지수를
세포들이 다 기억하고 실전(實戰)에
몸을 방어하는 능력을 배가시켜
좋은 성적(成績)을 얻게 한다는 것이다.
내 자신도 운동을 하면서 그것을 늘 경험하고 있다.
땀을 많이 흘릴수록 기록도 좋아지고
몸도 더 가벼워짐을 느낀다.
우리 인생은 장거리 마라톤과 같다.
움츠려지면 질수록 고난지수가
낮아 전진할 힘이 없지만,
힘이 들어도
고난지수를 자꾸만 높여나가면
순풍에 돛을 달듯이 더 빨리 나갈 수가 있다.
고난은 이렇게 자신을 찾고
또 장거리 인생에 큰 힘을 얻게 한 후,
영광(榮光)된 미래가 기다리기에 필요한 것이다.
부활절은 반드시 사순절이 지나야 온다.
드라마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공이 되는 길은
십자가를 지고 사순절적인
고난의 삶을 살아가야만 부활의 영광은
자신의 것이 될 수가 있다.
고난은 분명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과목(科目)이지만,
그 과정을 통과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헛된 욕심이 사라지면서
자아(自我)가 보이고
미래(未來)가 보이고
그리고 면류관의 주인이 되게 한다.
우리가 위대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돈이 많거나 지식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모두가 이 과정을 잘 이수(履修)했기 때문이다.
욥은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지만
단련 후에 정금같이 나아가
이전과 비할 수 없는
영광된 삶을 경험하게 되었다.
바울도 그랬고,
모세도 요셉도 다윗도 다니엘도
고난대학을 졸업한 영광스러운 사람들이다.
얼마 전에 인터넷에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 씨
발 사진이 올려 졌을 때,
나는 합성된 사진으로 알고 믿지 않았는데
나중에 그 사진이 진짜라는 것을 알고
할 말을 잊고 목이 메었다.
얼마나 연습을 했기에
발이 저 모양이 되었단 말인가.
김연아 양이 1% 재능과 99%의 연습이
오늘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말했듯이
누구도 고난 없는 성공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모습은 화려하지만,
그 배후엔 이렇게나 고통의 시간들이
있었음을 망가진 발이 큰 소리로
증언(證言)해 주는 듯 했다.
그러므로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은
누구나 최선을 다한다면 꿈은
현실 속으로 인도하기에,
오늘도 생의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했던 것을 어렵지만
지금 실천하는 사람이 영광스러운
내일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주여,
인생(人生)과 고난은
원래부터
한 형제였던 모양입니다.
인생의 수많은 가시들이 삶을
고통스럽게 했지만,
각자에게 허락하신 ‘40’을 통해
겨울을 견딘 나무가
꽃을 피우듯이,
땅과 하늘의 보좌를
연결시켜...
아픔만큼 구원이 있게 하고
자신을 죽이므로
동역자로 태어나게 하셨으니,
감사와 영광을
돌려 드리옵나이다.
앞으로도
두려워 말고 그 길을
당신과 함께 가게 하소서...
2007년 1월 25일 강릉에서 피러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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