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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 곽원갑

유앤미나 2008. 3. 25. 18:00



무인(武人) 곽원갑
손님이 강릉에 와서
영화보고 싶다고 말할 때 나는
주저하지 않고 ‘무인 곽원갑’을 추천(推薦)한다.
평소 무술영화는 잘 보지 않지만 곽원갑에
대한 인간성이 선택하게 한 것 같다.
이 영화는 19세기 초 개화기 때 중국이
제국주의 국가들로부터 위협받고 있을 때에
무인 곽원갑에 대한 실제 이야기다.
곽연갑으로 나오는 이연걸 씨도 중국
무술대회 우승자답게 우슈를 통한 화려한 기공은
막혔던 속도 뚫어주지만 그것보다는 주인공의 삶을 통해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게 했다는 점이
상영 내내 마음을 든든하게 했었다.

그는 무인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 반대로 무술은 배우지 못하나,
대결에서 패배한 아버지를 본 후에는 열심히
수련하여 천진에서 최고(最高) 고수가 되었지만,
자신의 무위만을 내세우다 실수(失手)로 한 노 고수를
죽이면서부터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져,
은둔의 길을 떠나고 그 길에서 그는
참된 무인의 길을 깨닫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천진은 이미 제국주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었고,
중국인들은 그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었다.
이에 곽원갑은 중국인의 기(氣)를 살려주려
세계적인 초고수에게 대결을 신청한다.
나는 ‘무인 곽원갑’을 보면서, 이전 그의
영화처럼 처음부터 영웅(英雄)으로서가 아니라
서서히 인간성을 일깨워가는 한편의
자서전(自敍傳)을 보는 느낌이 들었던 것은,
무술을 단순한 공격과
방어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고
그 이상의 것 곧 진정한 무인의 정신을 통해
인생을 완성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로 ‘진정한 승리(勝利)’가 무엇인가를 생각게 했다.
오직 최고의 무술인이 되고 싶었던 곽원갑,
마침내 그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동시에 그가 가장 사랑했고 가장
소중했던 모든 것을 잃었다.
승리에 도취(陶醉)되어
오만하고 자신만만했던 그가
한 순간에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렇게 모든 것을 잃은 후에야
깨닫는다는 그의 독백(獨白)처럼 최고를
향(向)해서만 달리다가
방황(彷徨)의 세월을 보내면서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줄을 깨달으면서
비로써 참된 무인(武人)이 되어 가는 것이었다.
이기는 것만이 진정한 승리인 줄 알았던 그가
쓰라린 패배(敗北)를 경험한 후
고향으로 돌아올 때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무’(武)는 그칠 ‘지’(止)와 창 ‘과’(戈)가 합쳐진
글자로 진정한 무(武)란 싸우는 것을
멈추는데서 출발한다.
무(武)란 이렇게
남을 해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마음속의 비수조차도 버리는 일, 곧 모든 것을
포용(包容)하고 용서(容恕)하는 일이다.

복수(復讐) 때문에 가족을 잃었던 그가
이제는 적과 싸우면서도 상대를
죽이는 살수를 거두는 진정한
무인이 된 것이다.
이젠 단순한 싸움꾼에서
나라의 자존심까지 지켜주었던
고전적 영웅이 되기까지의 과정들은 우리에게
스릴과 함께 뭉클한 감동까지 안겨주면서,
왜 싸워야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싸늘한 얼굴로 상대를 넘어뜨려야 승리(勝利)한다는
승패만의 의미를 가지고 싸우는 사람들에겐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없음을
그를 통해 교훈 받았던 것이다.

둘째는 ‘진정한 인생(人生)’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이 영화는 대부분 논픽션이다.
1:4의 대결이나 사랑이야기 심지어
시기적으로 암울했던 1900년대 초의 중국인들의
영웅적인 심리 묘사까지도 그대로 담고 있다.
이 영화는 이연걸의 다른 영화처럼
이상적인 인물이 아니라 우리네 이야기로
느껴졌던 것은 젊었을 때 많은 잘못도 저지를 뿐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잃은 고통도 경험하고
또 생각보다 빨리 죽는다는 스토리가
픽션과 달랐던 점이었다.
우리 인생도 곽원갑처럼 황당한 일도 많고
또 생각보다 많이 맞고 산다는 점에서
그 영화를 더 공감했는지 모르겠다.

또한 불공평한 것이 인생이다.
서방국들은 중국인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4명의 고수와 한명의 곽원갑과 대결시켜 놓는다.
그 일보다 더 부당했던 것은 독약 음모가
기다리고 있었건만 그는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던 것이다.
그의 말대로 무인의 정신이란
변명하지 않고 끝까지 정진하는 길이다.
이렇듯 인생은 불공평(不公平)할 때가 많지만
그럼에도 회피하지 않는 것이 인생이
가야할 길임을 보여준 것이다.

가장 부당하게 느껴진 일은 젊은 나이에 죽는 일이다.
고향으로 돌아와 정무문을 세워 중국인들을
하나로 뭉치는데 기여한 일이 화근이
되어 끝내 42살에 밀알처럼
죽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마지막에 가서 그가 다시 살아날 줄 알았다.
죽은 곽원갑과  이연걸의 나이는 실제로
같은 나이라고 한다.
인생은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그처럼 자신의 끝을 알고도 거부하지 않는 것,
품위 있게 죽는 것이 진정한 승리자의 모습일 것이다.

셋째로 ‘진정한 행복’에 대해 깊이 생각게 했다.
영화 속에서 감초처럼 광인(狂人)이 등장하여,
‘언제 천진 제일의 고수가 되느냐’고
질문하는 모습에서 이 영화는
단순한 무술영화가 아니라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처음부터 느낄 수가 있었다.
그 미친 사람 말처럼,
아니 본인이 그렇게도 원했던
천진 제일의 고수(高手)가 되었건만
가장 값진 것을 잃게 되면서 절망과 허무에 빠진
그는 작은 산골마을로 갔었는데 그 곳에서
생각지 않은 행복(幸福)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영화 ‘웰캄투 동막골’이 연상될 정도로 아름다운
농촌 풍경과 소박한 인정(人情)을 통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통해
그는 복락원의 향수 같은 것을 느끼며
진정한 행복과 생(生)의 의미를 깨달게 되었다.

맹인으로 등장하는 소녀가 곽연갑과 함께
모내기를 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모도 생명(生命)입니다.
너무 가까이 붙으면 서로에게 방해 되므로
최소한(最小限)의 거리가 필요합니다.’
그는 그녀를 통해
서로 존중하고 도우며 살 때
진정한 행복과 평안이 깃들게 됨을 배웠던 것이다.
그것은 육체와 정신과의 균형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연걸 자신도 물질로는 행복을 얻을 수
없음을 안 후 종교에 귀의했듯이,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내려놓는 순간,
이웃이 보이고 절대자가 보이면서
진정한 인생의 참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

주여,
오늘도 제가 이겨야 할 적은
눈앞에 있는 상대가
아니라
제 내면(內面)의 나약함 들입니다.
승리자들에겐 보이지 않는 불문율처럼, 
상대를 제압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추월하게 하소서.
그것은 타인이 아니라
자신을 대면할 때 먼저 두려움이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자신을 바로 바라보고
어떤 일이든지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는
의미입니다.
그 모습이
오늘도
용서(容恕)와 화해(和解)를 통해
나타나게 하소서.
2006년 부활절 날, 4월 16일 강릉에서 피러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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