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콤플렉스
이영자는
군인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 하는
연예인 1위로 선정되었다.
‘점참시’에서는 32사단을 찾아
특별한 강연을 했는데
군인들 뿐 아니라 시청자들도 감동을 받았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주변 상황이나
환경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왜곡된 내 안의 열등감이었다.’고
그녀는 운을 뗐다.
이어서
‘엄마가 생선가게를 하므로
비린내 나는 것이 내겐 콤플렉스였다.
늘 냄새 난다고 하면 어떡하지?
그래서 나도 모르게
냄새 맡는 게
나만의 습관이 되었다.’
또한 남아선호사상에 빠진
부모님 덕에
언제나 찬밥신세였던
자신을 누군가가 좋아한다고 하면
의심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에게
가장 무서운 인생의 적은 다름 아닌
‘콤플렉스’라고 결론지었다.
이어서
‘콤플렉스는 나만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까지 망칠 수 있다’면서
‘그러므로 인생에서
열등감을 해결하지 않으면
세상의 소리를 못 느끼더라.
오번역을 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장병들을 바라보면서
이영자는 말했다.
‘군대에 왔으니
이 시간 채워야 하지 않는가.
그 시간동안
자신에게 물어보라.
내 열등감이 무엇인지...
그것을 찾아내 박살냈으면 좋겠다.’고
강의를 마무리했다.
나는 그녀의 강의를 듣고서
내게도 아픔이 되었던
여러 열등감에 대해 생각해봤다.
‘열등감’이란
자신이 생각하는 기준보다 부족하다고
인지했을 때 생기는 감정이다.
하지만 ‘열등’은
분명 객관적으로 열등한 상태라면
‘열등감’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이고
상대적으로 나타나는 감정일 뿐이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내성적이거나
아니면 자존감이 낮은 이가
열등감에 빠지기 쉬울 것 같지만,
실상 이러한 성격과 상관없이
인간은 자신보다
월등한 무언가를 만날 때
그런 감정은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유독
‘열등감’이라는 괴물에
오랫동안 고통을 당하는 이들의
특징을 보면
원인 또한 저절로 알 것 같다.
그들 대부분은
자신을 자학적으로 대하거나
남의 과오는 쉽게 넘어가질 못한다.
분명 과거에 좋지 않는 기억들이
그런 사람을 만들었지만
근본적으론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심리가
짙게 깔려있기에
여전히
무가치한 감정의 노예가 되어
힘들게 살아간다.
열등감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던 아들러는
올바른 인격은
열등감과 보상을 통해 만들어 간다고 했다.
그렇게 해석한다면
열등감은 피할 수 없는 과제라면
인생이란 결국
콤플렉스를 내가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독이 되거나
보약이 되든지 둘 중 하나다.
이집트인에겐
나일강은 젖줄인 동시에
아킬레스건이었다.
아열대에 속한 그 땅은
우기만 되면 홍수로 엄청난 피해를 본다.
이것을 해결하려 대책을 세우다보니
달력에 필요한 숫자,
제방에 필요한 토목, 측량, 기하학 등이
발전하게 되었다.
그들은 나일강 범람에 굴복하지 않고
위기를 극복함으로
오히려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웠던 것이다.
인생도 그렇다.
살아가면서 수많은 콤플렉스는
약점이 아니다.
누구나
각자가 원하는 자기완성을 이루기 위해
극복해야 할 숙제일 뿐이다.
처음 세발자전거를 탈 때도 기쁘지만
눈비 맞으며 수없이
두발 자전거를 연습하여
드디어
혼자 탈 수 있을 때
그 기쁨을 무엇과 견주겠는가.
웃을 때보다도
울 때가 더 많은 인생은
자전거 타기와 비교자체가 안 된다.
자신에게
아킬레스건 같은 약점들이
지나놓고 보면
진정한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기에
고난을
‘위장된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소수에게만 적용되었던
억지 논리가 아니란
점이다.
드라마 ‘SKY캐슬’에는
상위 0.1%가 모여 사는 집단 안에서
자식을 어떻게든
성공시키고자 하는 부모들의
처절한 욕망과
민낯을 그렸던 드라마였다.
그 드라마에 그냥
나오는 장면은 없었다.
가상이지만
현실의 세계가 그렇게 돌아간다.
세상은 승자 아니면
패자라는 잔인할 정도로 단순한
구도만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런 세계가 어찌 희망이 있겠는가.
비록 극은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시궁창 같은 현실은
파멸밖에 없다.
이 모든 발단은
열등감처럼
남과 비교하는 데서 비롯된다.
수많은 경쟁구도 속에서
넘버 1이 되기보다는
남과 다른 오직 나(Only one)가 되어야만
이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다.
본래 인간은
태어날 땐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하지만 세상은
우릴 그냥 놔두질 않는다.
경쟁을 강요하여
줄로 세워 나를 평가할 뿐
그 누구도
내겐 아무 관심이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그 틀에 맞추기 시작했다.
사는 게 재미없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인지하면서
이런 결심을 해 본다.
‘나는 나일뿐이야.
나는 세상의 중심이니
나는 세상에 맞출 필요가 없다.
나는 나로써 살리라’
세상에서 나는
독립적인 존재이기에
그 자체만으로도 큰 가치가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특별한 나 됨을 알고
나답게 살아야만
남과 비교하지 않으며 자유롭게 살 수 있다.
거북이는 처음부터
토끼를 이기기 위해 그와
경주한 것이 아니었다.
더더욱 거북이는
평소 느린 것이 콤플렉스로 생각해
본적도 없었기에,
그에겐
패배라는 개념뿐만 아니라
승리는 더더욱
관심 밖의 영역이었다.
다만 그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그저 최선을 다해
자신의 길만 나아갔기에
경쟁에서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어찌 보면
그는 영원한 1등(Only one)이었을지
모르겠다.
2019년 2월 11일(월) 강릉에서 피러한(한억만)이 드립니다.
사진허락작가:하누리님, 우기자님, 이요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