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용신 蔡龍臣
채용신(蔡龍臣)은 철종(哲宗)이 즉위하던 해인 1850년에 출생하여 1941년에 사망한 조선 말기의 화가이다. 초명은 동근(東根), 호는 석지(石芝), 석강(石江), 정산(定山)이며, 초상화, 화조화(花鳥畵), 인물화 등을 극세극채색(極細極彩色)으로 잘 그린 화가로 유명하며, 70여 점의 초상화를 비롯하여 1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채용신은 무과(武科) 출신 관료이면서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御眞) 제작을 총괄하는 우두머리 화가인 주관화사(主管畵師)로 활약하였다. 이후 집안 연고지인 전주(全州) 일원에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쳤다. 1941년 6월 정읍 신태인 육리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92년 생애 중 40여 년을 전라도에서 보냈다. 그는 우리나라 초상화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서양화법(西洋畵法)과 사진술(寫眞術)을 받아들여 전통(傳統)과 혁신(革新)이 공존하는 자신만의 화풍을 완성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만 9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붓끝에 담아냈다.
1850년 서울 삼청동에서 대대로 무관(武官)을 지낸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돌산진수군첨절제사(突山鎭水軍僉節制使)를 지낸 채권영(蔡權永)이고, 어머니는 밀양 박씨이다. 채용신 역시 1886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20년 넘게 관직에 종사하였다. 그의 벼슬은 칠곡군수와 정산군수를 역임한 뒤 종2품관까지 지냈다.1905년 관직을 마치고 전라북도 전주(全州)로 내려와 익산, 변산, 나주, 남원 등지를 다니면서 우국지사(憂國志士)와 유학자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에 몰두하였다. 1941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 일본인 관리의 주선으로 6월 4일부터 10일까지 서울의 화신백화점(和信百貨店)에서 유작전이 열리기도 하였다.
전래묘화불무인 全來妙畵不無人
상물수공미상인 像物雖工未像人
유유석강모사활 猶有石江摹寫活
일당합석고금인 一堂合席古今人
예부터 오묘한 그림을 그린 사람이 없지 않은데 / 물건을 형상함이 비록 공교해도 사람은 형상하지 못하였네 / 오직 석강(石江)께서 모사한 것이 생동하여 / 한 집에 옛 사람과 지금 사람이 자리를 함께 하였네.
인간은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존재에 영원(永遠)을 부여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초상화를 선택하였다. 특히 사회적 지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거나 인물의 위대함을 본존하기에 효과적이었던 초상화는 문자(文字)가 가질 수 없는 시각적(視覺適) 위엄과 상상력까지 자극함으로써 시공간(視空間)의 한계를 해체시켰다.
이런 점에서 초상화는 인간과 미술, 역사(歷史)와 미술의 관계를 필연적인 관계로 맺어준 ' 역사의 중매자 (歷史의 仲媒者) '이기도 하다. 한국 초상화의 역사는 고구려 고분(古墳) 벽화에서부터 현재까지 오랜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지만, 미술사적으로 가장 많은 인물초상화가 제작된 시기를 역시 조선시대이다.
오늘날 수많은 초상화가 유실(流失)되어 그 위대함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현존하는 작품들의 독창성과 탁월한 회화성(繪畵性)만으로도 조선시대를 초상화의 전성시대로 기록하는 것은 그리어렵지 않다. 비록 중국 초상화로부터 표현양식과 제작의 기본 정신인 ' 전신사조 (傳神寫照) '은 빌렸지만, 결코 모방적인 아류(亞流)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의 정신과 품격이 담긴 독자적 기법과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한국적 초상화의 전통을 세운 우수함은 자랑할 만하다.
고종(高宗)의 어진(御眞)을 비롯하여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최익현(崔益鉉), 김영상(金永相), 전우(田愚), 황현(黃玹), 최치원(崔致遠) 등의 초상과 '고종대한제국동가도(高宗大韓帝國動駕圖) 등을 그렸으며, ' 운낭자 27세상(雲娘子二十七歲像) ', ' 황장길부인상(黃長吉夫人像) '등 여인상도 그렸다. 70여 점의 초상화를 비롯하여 100여 점의 그림을 남겼다.
채용신의 화풍
채용신은 조선시대 전통양식을 따른 마지막 인물화가로, 전통 초상화 기법을 계승하면서도 서양화법과 근대 사진술(寫眞術)의 영향을 받아 ' 채석지 필법 (蔡石芝 筆法) '이라는 독특한 화풍(畵風)을 개척하였다. 화법의 특징은 극세필(極細筆)을 사용하여 얼굴의 세부 묘사에 주력하고, 많은 필선(筆線)을 사용하여 요철(凹凸), 원근(遠近), 명암(明暗) 등을 표현한 점이다.
그리고 극세필(極細筆)을 사용하여 얼굴의 육리문(肉理文) 묘사에 주력하였으며, 정장관복초상(正裝官服肖像)의 경우 주인공의 오른쪽 어깨 위 등쪽으로 두 개의 볼록한 주름 같은 모습의 단추가 있는 점, 콧대 등 얼굴의 뼈가 나온 부분을 하얗게 칠하여 백광(白光)을 주는 점, 주인공이 깔고 앉아 있는 화문석의 문양과 각도가 시대적으로 변한 점 등이 그의 화풍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전신사조 傳神寫照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감상용(鑑賞用) 미술품이라기보다는 제사(祭祀) 등 의식용(儀式用)이었다. 당시 초상화는 ' 머리카락 한 가닥도 닮지 않으면 다른 사람으로 보인다 (一毫不似 便是他人) '는 사실적 묘사를 바탕으로 대상의 외형(外形)뿐 아니라 내면세계(內面世界)까지 표현하는 전신사조(傳神寫照)를 추구하였다.
즉 옛 화가들은 이러한 치밀성과 조심성으로 초상화를 그렸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모델의 내면 심리와 인격(人格) 나아가 사상(思想)까지도 담으려고 노력하였다. 줄여서는 전신(傳神)이라 하며, 초상화에 있어 인물의 외형묘사에만 그치지 않고 그 인물의 고매한 인격과 정신까지 나타내야 한다는 초상화론(肖像畵論)이 바로 '전신사조'이다.
초상화 사업 肖像畵 事業
1906년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 종3품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등을 지낸 56세의 무관(武官)이 관직생활을 마치고 선산(先山)이 있는 전라북도 지역으로 내려온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면 한가로이 살았던 대부분의 양반들과는 달리 활발한 '비지니스'를 펼친다. 고종(高宗)의 어진(御眞)을 그렸던 화려한 경력, 타고난 화재(畵材)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며 지역 유지들의 초상화를 제작하며 '인생 이모작'에 성공하였다.
채용신은 낙향(落鄕) 후 전라북도 익산 금마(金馬)에서 ' 금마산방(金馬山房) '을 운영하면서 최익현(崔益鉉)을 비롯한 우국지사(憂國志士)의 초상을 대거 제작하였다.그리고 채용신(蔡龍臣)은 1923년에 정읍 신태인(新泰仁)에 ' 채석강도화소 (蔡石江圖畵所) '라는 초상화 전문 공방(工房)을 열었다.
채용신이 그의 아들, 손자와 함께 운영한 이 공방(工房)의 가장 큰 특징은 ' 사진(寫眞) '을 바탕으로 초상화를 제작하였다는 점이다. ' 사진을 보고 초상화를 제작하였을 때 실물(實物)과 닮지 않았을 겨우 책임을 지겠다 '는 홍보(弘報) 문구를 내걸었고, 초상화의 모델이 사진(寫眞)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경우에는 공방(工房) 측에서 사진사를 보내 촬영하는 '출장 서비스'까지 제공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의 아들과 며느리는 서울에서 사진관을 운영하였다.
모델이 직접 공방을 방문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없애고, 초상화 제작기간을 단축하여 공방은 크게 번창하였다. 초상화를 그려주는 대가(代價)는 성장(盛裝)한 입상(立像)이 100원, 남녀 양복 반신상(半身像)은 80원이었다. 당시 쌀 한 말이 3.5원이었으니 무척 비싼 대가이었다.
계몽운동 啓蒙運動
한편 채용신은 1907년 호남출신 민족주의자 상공인(商工人)들이 호남지방의 교육 발전과 국권(國權) 회복을 위해 서울에서 조직한 계몽운동 단체인 ' 호남학회 (湖南學會) '에 참여 활동하였다. 호남학회 가입 및 활동은 채용신의 유일한 단체활동이다.
호남학회의 주요 발기인은 이기(李沂), 감경중(金璟中), 백인기(白寅基) 등이었다. 그해 7월 6일 서울 대동문우회관에서 112명이 참석하여 창립총회를 갖고, 서울에 중앙회를 두고 전북에 29개, 전남에 23개의 지회를 두었다. 회원 자격은 20세 이상의 전라도 출신인 사람이다. 주요활동은 사립학교 설립, 계몽 강연회 개최, 유학생 재정 후원 등이었다. 기관지 호남학보(湖南學報)를 1908년 6월부터 간행하였으나, 재정난으로 1909년 9호를 끝으로 폐간하였다. 이후 계속된 일제의 탄압과 학회분열책동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다가, 19010년 한일하병 후 해체되었다. 학보 제7호 회원명부를 보면 총 32명 중 21번째에 ' 채용신 익산 (蔡龍臣 益山) '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현재 원광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작품은 익선관(翼善款)에 황색의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용상(龍床)에 정면을 향하고 앉아 있는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이다. 뒤에는 일월병풍도(日月屛風圖)가 둘러쳐져 있고, 병풍 뒤에 붉은 첨을 그린 후 ' 광무황제 사십구세 어용 (光武皇帝 四十九歲 御容) '이라고 적어 넣었다. 초상화에서 주인공이 정면을 보며 몸 전체를 드러낸 채 공식 복장을 입고 앉아 있는 것을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이라고 한다.
아래 그림은 채용신이 고종(高宗)의 나이 49세 때 그린 황제의 어진이다.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를
배경으로 익선관을 쓴 채 곤룡포 차림으로 정면을 보며 앉아 있는 고종의 모습이 마치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숨쉬는 듯 매우 리얼한 느낌을 주고 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임금의 곤룡포 색(色)이 붉은색으로만 한정되어 있었던 그간의 아픔을 떨쳐버리고 고종은 직접 황제(皇帝)가 되면서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黃色) 곤룡포를 입고 있는 것이다.
1900년 선원전(璿源殿 ... 어진을 모신 궁전)의 중수(重修)를 결심한 고종은 선대(先代)의 어진을 모사(模寫)할 만한 화가를 찾는다. 대대로 무관(武官)을 지낸 가문의 자제로 독학으로 그림을 배워 버릴 때부터 '신동'으로 불렸고, 22세에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초상을 그려 이름을 떨친 채용신이 물망에 오른다. 고종의 부름을 받은 채용신은 당시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 조석진과 함께 태조(太祖)의 어진을 성공적으로 모사(模寫)하여 고종(高宗)의 신임을 받는다. 이듬해에는 고종(高宗) 어진을 그리면서 명실공히 ' 조선 최고의 초상화가 '의 자리에 올랐다.
봉명사기 奉命寫記
봉명사기(奉命寫記)는 채용신(蔡龍臣)이 63세 되던 해인 1914년에, 어진(御眞)제작에 참여한 시말(始末)을 기록한 것으로, 곳곳에서 나라가 망해버린 비통함을 토로하고 있다. 채용신은 1900년에 조선 태조(太祖)의 어용(御容)을 모사하였던 한국 초상화의 마지막 대가이다. 고종(高宗)은 이때 그가 머물던 거처이었던 부안(扶安) 근처 채석강(采石江)의 이름을 따서 석강(石江)이라는 호(號)를 하사하였다.
오호라 ! 지금 국가 전역에서 타인들이 코를 골며 자는 땅이 되어버렸는데도 임금이 욕을 당함에 신하가 죽는 의리를 실천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눈에 가득 보이는 것은 왜침(倭侵)으로 인하여 나라가 망한 광경뿐이다. 진실로 나라를 근심하는 눈물을 금할 수 없다. 생각해 볼 때, 옛날에 용안(龍顔)을 가까이 대하고 우러러 일월(日月)의 모습과 용봉(龍鳳)의 자태를 그림에 군신(君伸)이 친밀하고 묻고 대답함이 정성스럽고 흡족하였다. 마음 속으로 생각할 때, 이나 서캐처럼 보잘 것 없는 내가 일월(日月)의 말광(末光)에 의지하여 거의 물방울이나 티끌 같은 충성을 궁궐 아래에서 바칠 수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한수(漢水)는 동쪽으로 흐르고 있지만, 우리 왕실의 사직을 회복하지 못하여 왕실이 천(賤)한 신하가 폐하를 보지 못한 지가 9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장안에서 왕을 보지 못하는 근심이 지극히 간절하여서 한갓 ' 옥루(玉樓) 높은 곳에서 추위를 이기지 못한다 '는 시구만을 읊조릴 따름이다. 삼가 당시의 대략적인 일을 써서 감상에 만의 하나를 부칠 따름이다. 갑인년 4월 모일, 전 정산군수 신 채용신이 머리를 조아리며 삼가 쓰다.
고종(高宗)이 채용신에게 베푼 총애는 대단하였던 듯,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어진(御眞) 제작 도중 고종은 채용신에게 그의 호(號)를 물었다. 채용신이 석지(石芝)라고 대답하자, 왕은 ' 너의 거처가 부안현에 가까운데, 그곳에는 채석강(彩石江)이 있지 않는냐?, 네 성이 이미 '채'이니 이제 호를 '석강(石江)'이라 한다면, 저 채석강과 음(音)이 우연히 합치되어 그 아름다운 이름과 비슷하게 될 것이니, 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라고 하면서 석강(石江)이라는 호(號)를 친히 내렸다고 한다.
쪽진 머리, 가늘고 긴 눈매와 어울리는 단정한 입매, 홍조를 띤 달걀형 얼굴이 영락없는 미인산(미인상)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여인의 팔에 안겨 있는 벌거벗은 아이가 눈에 들어온다. 다소 성숙해 보이는 아기는 왼손에 둥근모양의 물체를 들고 해맑게 웃고 있다. 그러고 보니 아기의 머리 부근, 여인이 저고리 밑으로 드러난 불룩한 맨 가슴이 눈에 띤다. 젖먹이 아기를 둔 여인임을 나타낸 것일까. 잠시 멈춘시선은 다시금 옅은 푸른색으로 음영(陰影) 처리된 그녀의 치마폭을 따라 내려가 단 아래 살포시 고개를 내밀고 있는 하얀 버선코 한 짝에 가 닿는다.
화폭 오른쪽 상단에 ' 운낭자이십칠세상(雲娘子二十七歲像)'이라고 적힌 화제(화제)는 이 여인이 스물일곱 살의 '운낭자(雲娘子)'임을 알려준다. 또한 왼편에는 그보다 작은 글씨로 ' 갑인늑월석지사 (甲寅勒月石芝寫) '라고 적혀 있고, 이어서 ' 석지(石芝)' 그리고 '정산군수채용신신장(定山郡守蔡龍臣信章)'이라는 두 개의 낙관(落관)이 보인다. 따라서 이 그림은 1914년 5~6월에 채용신이 그렸으며, 그가 정산군수(定山郡守)를 지낸 바 있음을 알 수 있다.
채용신은 어떤 연유로 '운낭자'의 초상을 그리게 된 것일까? 아무리 유교적 질서와 신분제가 와해된 조선 말기의 20세기 초라 하더라도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여인의 단독 초상화 제작은 흔치 않은 경우이다. 게다가 가슴을 드러낸 채 벌거벗은 아이를 안고 당당한 자태로 서 있는 여인이라니 ! 이는 분명 기조부부상의 일부인 '부인상'이나 풍속화 속 '젖먹이는 여인' 혹은 남성의 시선을 사로잡는 '미인도'와는 다른 종류의 초상화이다. 그러면 '운낭자'는 과연 누구인가 ?
운낭자 雲娘子
운낭자(雲娘子)는 '순조실록' 12년(1812년) 1월 10일의 기록에 의하면, 평안도 가산(嘉山)의 관청에 소속된 기생 최연홍(崔蓮紅. 1785~1846)이 가산군수 정시(鄭蓍)의 소실로 들어가게 되는데, 1811년 홍경래의 난 (洪景來의 亂) 때 남편 정시(鄭蓍)와 시아버지가 죽자 27세의 최연홍(崔蓮紅)은 이들의 시신(屍身)을 거두어 장례를 지내고, 다친 시동생을 보살펴 살리는 등 의롭게 행하였다고 한다. 훗날 이 소식이 조정에 전해져 최연홍은 기적(妓籍)에서 이름이 빠지고 전답(田遝)을 하사(下賜) 받았으며, 그녀가 죽은 뒤 열녀각(烈女閣)인 평양 의열사(義烈祠)에 제향되었다는 것이다. '운낭자'는 최연홍의 초명(初名)이자 기생 때 불리던 이름이었다. 채용신은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의기(義妓)이자 열녀(烈女)인 최연홍을 기리기 위해 제작된 사후(死後) 초상화인 것이다.
인물의 사후(死後), 후대에 제작되었으므로 실제 인물과 닮았다기보다는 그 인물이 업적을 기리는 차원에서 이상화(理想化)된 형상과 모델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몇몇 연구자들은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작자 미상 '미인도 ... 위 사진 중 오른편 '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채 없이 쪽진머리를 매만지는 여인(아마도 기생)을 그린 전형적인 19세게 미인도이다. 치켜든 팔을 따라 올라간 저고리 밑으로 여인의 탐스러운 가슴이 드러나 있고, 나머지 한손으로 살포시 걷어 올린 치맛자락 아래 속바지와 양 버선발이 보인다.
최익현 초상 崔益鉉 肖像
보물 제 1510호로 지정되어 있다. 구한말의 대표적인 우국지사(憂國志士)인 '면암 최익현 (勉庵 崔益鉉) '의 초상화로, 그의 말년인 1905년에 채용신이 그린 작품이다. 심의(深衣)를 입고 털모자를 쓴 모습의 반신상(半身像)인데, 심의(深衣)는 전통성리학자(性理學者)로서의 풍모를 나타내고 털모자는 의병장(義兵長)으로서의 풍모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크기는 가로가 51.5cm, 세로가 41.5cm이다.
채용신의 초상화 인물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위 사진의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이다. 척사(斥邪)의 거두(巨頭)로서 조선말 개화파와 대립하는 입장에서 당대 유림(儒林)들을 이끌었던 최익혀는 채용신이 정산군수(定山郡守) 시절에 만난 인연을 토대로 이후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어온 인물이다. 면암 최익현 가족의 청(請)으로 최익현의 초상화를 제작하게 된 채용신은 이후 여러 차례 이모(移模)를 통하여 그의 정신과 모습을 재현하였다.
최익현 崔益鉉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우국지사(憂國志士)이다. 그는 1868년 경복궁 중건(重建)과 당백전(當百錢)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이후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斷髮令)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抗日義兵運動)의 전개를 촉구하며 전라북도 태인에서 의병(義兵)을 모았다. 그러나 순창에서 일본군에 패하여 체포되었고, 이어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敵)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 단식(斷食)을 하다가 일본측의 사과로 단식을 멈추었다. 그후 그는 대마도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대상 인물에서 보는 채용신의 역사성
채용신과 최익현(崔益鉉)의 만남은 이후 면암 최익현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이들의 초상화를 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가 남긴 초상 주인공들의 공통된 사상(思想)과 채용신의 정신적 배경을 엿볼 수 있다.
이는 면암 최익현의 제자일 의병장(義兵將) 임병찬(林炳瓚)의 초상화를 그린 것을 비롯하여 항일지사(抗日志士)인 김직술(金直述), 김영상(金永上), 박해창(朴海昌), 기우만(寄宇萬), 이덕응(李德應), 이병순(李秉巡), 등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초상화의 주인공들이 한말(韓末)에 시작된 혼돈의 시기에 의병(義兵)활동이나 항일(抗日)투쟁의 의지를 표명한 우국지사(憂國志士)들임을 알 수 있다.
특히 1911년에는 호남기호학파의 거유(巨儒)로서 의병활동보다는 내수를 우선으로 할 것을 주장하였던 전우(田愚)의 초상화와 경술국치의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절명시 4수를 남긴 채 자결했던 황현(黃玹)의 초상화는 그 작품의 완성도 못지않게 그들이 보인 우국충정의 정신성을 귀감으로 삼고자 했던 채용신의 의지(意志)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채용신이 당시 우국지사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는 사실은 채용신과 이들의 관계가 단순히 작품 제작상 만나는 화가와 주문자로 머물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는 '석강실기'에 기록된 최익현과 전우(田愚)와의 교유 및 제자들과 왕래한 글에서도 그 관계성이 드러나고 있다.
한편, 채용신은 개인적 친분이나 선택에 의한 제작 외에도 어진화가(御眞畵家)이었던 그의 명성을 따라 조상의 초상화를 그려 받고 싶어 하는 주문자들의 요청에도 적극적으로 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후일 제작한 초상화가 역사적 인물이나 사상가 외에도 재력가나 일반인까지 다양한 계층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신분적 제한을 두지 않았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한층 확대된 의미에서 시대의 인물상이 채용신의 붓끝에서 재현된 것으로 1920년대 후반부터는 급변한 사회변동 속에서 화가로서의 삶에 보다 충실한 결과라 여겨진다.
무엇보다 채용신 스스로 주문제작 과고까지 펼치며 초상화제작에 적극적이었던 그의 행적이 증명하고 있다. 그가 남긴 예술적 흔적은 조선말기 가장 급변한 역사의 전환기에 살았던 인물들의 삶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그 역사성(歷史性)을 갖고 있다. 채용신의 초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역사적 인식과 의식을 가진 인물들이고, 의병활동에 직간접으로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 주를 이룩 ㅗ있다는 점에서 채용신의 초상화가 지닌 역사성은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할만한 이유가 된다. 한편 그의 작품이 서양문물을 활용한 조형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점 또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특히 초상화의 주인공들은 신문물(新文物)을 배척하는 인물들로 채웠지만, 정작 그들을 표현하는 방법에서는 서양 문물에 기대어 있는 점에서 그의 초상화에는 문물(文物)로서의 개화(開化)이지만, 사상(思想)으로는 척화(斥和)라는 대립이 담겨져 있다.
간재 전우(艮齋 田愚. 1841~1922)는 오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났으며, 스승 임헌회(임헌회)를 따르며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가르쳤다. 그는 고종(高宗)으로부터 몇 차례 여러 벼슬을 제수받고도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수구파(守舊派) 학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개화파(開化派)로부터 전우(田愚)를 죽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그는 전통적인 도학(道學)의 중흥만이 국권회복의 참된 길이라고 여기고 부안, 군산 등지의 작은 섬에서 학문을 펼쳤으며, 72세부터 82세에 죽을 때까지 계화도(界火島)에 정착하여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그는 전통적인 유학사상을 그대로 실현시키려 한 점에서 조선 최후(最後)의 정통 유학자로 추앙받고 있다.
이 초상화는 전우(田愚)가 계화도(界火島)에 머물던 80세 때(1920년)의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그의 문인 김종호(金鍾昊)가 제발을 적었다. 화면의 1/3까지 차지하는 돗자리에 황색 평상복 차림에 장보관(章甫冠)을 쓰고 있다. 얼굴 표현은 짧은 필선(筆線)으로 채색(彩色)을 반복하여 음영(陰影)을 표현하였는데, 완고한 선비의 모습이 잘 묘사되고 있다. 옷주름은 소략하고 음영을 가하였으며, 배경에도 먹으로 선염(渲染)을 가하여 신체가 두드러지게 하고 있다. 선염(渲染)이란, 동양 회화의 기법으로 종이에 물을 먼저 칠하고 마르기 전에 수묵이나 채색을 가하여 표현 효과를 높이는 기법이다. 안개 낀 산수(山水)의 흐릿한 정경이나 우중(雨中)의 정취 또는 으스름한 달밤의 풍경을 표현하는 데 활용된다.
채용신(蔡龍臣)은 초상의 안면(顔面) 묘사를 전통적인 선(線)에 의존하지 않고, 밝은 부분과 어두운부분으로 나누어 무수히 자잘한 붓질을 걷브함으로써 얼굴이 기본적으로 면(面)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실체감이 강하게 느껴지며 의복의 주름 처리 역시 같은 면(面)으로 처리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화면의 장식성(裝飾性)에도 유의하여 흉배와 각대 등에도 화려한 나금장식을 베풀고 바닥에 깐 화문석도 장식효과를 최대한 살리고 있다.
전우(田愚)는 정면을 응시하며 손을 모은 채, 선비들이 평소에 애용하던 장보관(章甫冠)을 쓰고 심의(深衣)를 입고 있다. 얼굴을 보면 가늘고 긴 필선(筆線)을 무수하게 그어서 섬세한 색상 변화로 얼굴의 입체감(立體感)을 나타내었으며, 그 위에 갈색 선으로 대담하게 얼굴 주름을 그었다. 옷의 주름부분에는 그늘을 넣었으며 단순하게 처리하여 단아한 느낌이다. 인물 주위에 담묵(淡墨)으로 배경을 두어 깊이감을 주었다. 소품이고 화려한 기량은 없지만 최익현 초상과 함께 항일(抗日) 우국지사의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다.
정면관 正面觀
채용신의 초상화에서 전신사조(傳神寫照)의 의미를 가장 잘 반영한 얼굴 묘사는 정면관(正面觀)이라는 자세와 연관하여 그 의미가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정면관(正面觀)의 초상화는 중국 청나라 시대에 크게 성행했던 형식으로 우리나라 초상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현존하는 조선시대 초상화 작품들은 완전한 정면을 피(避)한 형식이 주를 이루고 이다는 점에서 유독 정면관을 고집한 채용신의 선택은 매우 흥미롭다.
정면관 형식은 그림을 바로보는 관람자를 똑바로 응시하는 자세로 매우 엄숙하고 딱딱한 분위기를 준다. 부동자세의 무표정한 정면관 초상화를 예의, 근엄, 권위와 같은 개념과 같이 보는 시각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정면관의 특징은 한국 초상화의 대표작(代表作)으로 꼽는 윤두서(尹斗緖)의 자화상(自畵像)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현대미술에서는 정면관으로 표현한 그림에 대해서 더 이상 거부감이나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다. 사실 정면관은 르네상스 이후 서양미술의 초상화 역사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이었지만, 현대미술에서는 정면관이 외형(外形)과 내면(內面)을 드러나는 데 가장 효과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에서 채용신이 선호하였던 정면관은 인물의 성격과 품격을 관람자에게 강하고 직접적으로 전달하기에 효과적이기에 선택된 것으로 여겨진다.
사실 채용신이 고집한 정면관은 얼굴 묘사 시 일반적으로 명암(明暗) 처리가 쉽지 않은 자세이다. 따라서 형식상 정면관을 취하면서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초상화를 완성하려면 그에 적합한 명암처리가 필수적이다. 이에 당대의 화가들은 얼굴묘사에서 사진적 효과를 적극 도입한다. 그러나 채용신은 이 문제에서 안면(顔面)의 돌출부위에 속하는 콧날이나 이마의 눈두덩 부위를 가장 밝게 처리하는 방법을 사용했을 뿐 현대미술에서 입체적 표현을 위해 선택하는 명암법(명암법)이나 사진적 효과의 직접적 도입에는 거리를 두었다.
예를 들어 인물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진적 조명효과를 활용하거나 인물의 돌출된 부위부터 점차 흐릿하게 처리하는 단계적 변화기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채용신의 초상화는 한국적 초상화의 특징을 잘 살린 분위기와 조화로움이 느껴진다. 먼저, 얼굴 묘사는 전통적으로 이어온 배채법으로 그렸다. 그리고 전통기법 위에 한층 사실적 모사를 위해 얼굴 근육과 피부 살결(육리문. 肉理紋)을 따라 세필(細筆)로 하나둘씩 겹쳐 올린 듯한 정밀세필을 시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얼굴묘사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 할 수 있는 눈동자는 반사점까지 그려 내어 초상 주인공의 정신성을 살리려는 정교함까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황현 초상 黃玹 肖像
한말(韓末)의 대표적인 문인(文人)이자 우국지사인 ' 매천 황현 (梅泉 黃玹) '의 초상화와 사진(寫眞)은 보물 제149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초상화의 크기는 가로 72.8 cm, 세로 120.7cm의 규모로 채용신(蔡龍臣)의 작품이다. 이 초상화는 황현(黃玹)이 순국(殉國)한 다음 해인 1911년 5월에 제작되었으며, 채용신은 황현(黃玹)이 1909년 천연당 사진관에서 찍어두었던 사진(寫眞)을 보고 묘사한 것이다.
이 초상화는 사진(寫眞)을 보고 그린 것이지만 실제 인물을 마주 대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만큼 매우 뛰어난 사실적 묘사를 보여주고 있다. 초상화에 묘사된 '매천 황현'은 심의(深衣 .. 덕망이 높은 선비의 웃옷으로 백색 천으로 만들고 옷 가장자리에 검정비단으로 선을 둘렀다)를 입고 포대(布帶)를 맨 뒤 정자관(程子冠)을 쓰고 있는 모습이다. 둥근 뿔테 안경을 쓰고 있으며 오른손에는 부채들 들고 왼손에는 책을 든 채 바닥에 화문석 돗자리를 깔고 앉은 부좌상(趺坐像)이다.
자세는 약간 왼쪽으로 앉은 정면상(正面像)에 가까운 모습인데 이는 애초 황현(黃玹)이 찍은 사진의 모습에서 온것이며, 부채와 책을 들고 있는 것도 기본적으로 사진의 모습을 따르면서 약간 변형시킨 것이다. 사진은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뒤 의자에 앉아 책을 펼쳐들고 있는 모습인데, 초상화는 심의(深衣)를 입고 정자관(程子冠)을 쓴 뒤 화문석 돗자리를 깔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 약간 바뀌었다.
이 초상화의 핍진 (逼眞 .. 진실에 거의 가깝다. 마치 사실과 같다) 함은 황현(黃玹)이 쓰고 있는 정자관(程子冠) 묘사나 피부 처리에서 단적을 드러난다. 정자관(程子冠)은 속의 망건이 비쳐 보일 만큼 투각적으로 처리되었고, 올과 올의 겹쳐짐은 실물 그대로 재현(再現)되어 있다.
피부(皮膚)는 마치 살아있는 실제 살갗처럼 손을 뻗으면 만져질 듯 촉감적이며, 주름은 살갗 속에 배어 있는 듯하다. 턱수염은 마치 바람이라도 불면 금방 나부낄 듯하다. 선염(渲染)기를 집어 넣어 표현한 옷주름 역시 옷의 질감을 충분히 살리고 있는데, 음영(陰影)의 표현이 조화롭다.
정자관 程子冠
정자관(程子冠)은 조선 중기 서당의 훈장들이나 양반들이 평상시 집에서 쓰던 관(冠)으로, 평상복 착용 시에 사용한다. 망건 위에 탕건을 쓴다음 그 위에 덧쓰는 것이다. 원래는 당건(唐巾)이라 하는 중국제 관모 중의 하나이었다. 중국 북송(北宋)의 유학자인 정자(程子)가 처음 쓰기 시작하여 '정자관' 혹은 '정자건'이라 불리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중종(中宗), 명종(明宗) 때부터 구한말까지 양반들 사이에서 널리 애용되었다. 주자관(朱子冠)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의 관제(冠制)에는 '정자관' 외에도 동파관(東坡冠), 충정관(沖正冠) 등이 있는데, 각자 자신의 취향대로 개성에 맞는 관을 선택하여 즐겨 사용하였다. 그중에서 후세에까지 널리 착용된 것은 위엄이 있어 보이는 정자관이었다.
사대부들은 예의상 평상시에도 갓'을 쓰고 다른 사람을 대해야 했기 때문에 매우 거추장스러웠다. 그래서 갓 대신에 이 정자관(程子冠)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형태는 안에 사각형의 높은 내관(內冠)이 있고 바깥에 다시 '산(山)'자형을 2단 혹은 3단으로 덧붙여 처리하였기 때문에 2층 정자관, 3층 정자관이라는 명칭을 붙이기도 하였다. 위의 세 봉우리는 터져 있는데, 대체로 지위가 높을수록 층이 낮은 것을 썼다. 재료는 보통 말총을 사용한다.
채용신이 그렸다는 팔도미인도(八道美人圖)는 실제 인물을 모델로 삼아 그렸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작품이다. 조선시대 팔도(八道) 미인(美人)의 구체적인 얼굴형과 특징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8폭(幅)짜리 병풍으로 그렸다.
이 병풍 속 미인(美人)들은 서울, 평양(平讓), 경남 진주(晉州), 전남 장성(長城), 강원 강릉(江陵), 충북 청주(淸州), 전북 고창(高敞) 등 8개 지역(한 곳은 미상)의 미인(美人)과 기생(妓生) 등 8명의 전신상(全身像)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평양 기생 계월향(桂月香), 장성 관기(官妓) 지선(芝仙), 진주 관기(官妓) 산홍(山紅), 강릉 미인 일선(一善) 처럼 각각의 화폭에는 주인공의 실명(實名)이 적혀 있다. 한 예로 그림 속의 진주 미인은 이마가 낮고 가로로 넓으며 눈썹이 높게 붙어 눈두덩이 넓고, 눈 사이도 넓은 편이다. 이 진주 미인은 중안(눈썹에서 코 끝 사이)이 길어 기품이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또 턱 부분이 작고 인중(人中 .. 코아 윗입술 사이에 오목하게 골이 진 부분)이 짧아서 젊은인상을 주는 등 현대적인 시각으로 보아도 아름다운 여인이 아닐 수 없다.
조선시대 미인의 기준은 무엇일까 ? 1번, 강릉 미인 일선(一善)은 이마가 높고 넓어 서글서글한 인상이고, 2번의 평양 미인 계월향(桂月香)은 턱이 뾰족하고 광대뼈가 도드라지지만 이록구비가 적어 전형적인 미인의 모습이다. 3번, 함경도 미인 취련(翠蓮)은 입술과 눈이 작으면서도 맵시 있고, 4번의 청주 미인 매창(梅窓)은 다소곳한 모습이 기품 있다. 5번, 장성 미인 취선(翠仙)은 눈이 크고 눈썹이 길어 아담한 느낌이고, 6번 화성 미인 명옥(明玉)은 기다란 눈가 코가 매력적이다. 7번, 진주 미인 산홍(山紅)은 둥그스럼한 얼굴에 이마가 편평해 우아한 멋을 자아내고 8번 서울 미인 홍랑(紅朗)은 볼이 통통하고 콧방울이 커 애교 넘치는 모습이다.
팔도미인도의 인물들은 모두 역사상 실존 인물들로 조선 초기부터 구한말 시대에 이르기까지 500년 역사 속에서 각 시대를 풍미하던 유명한 기생(妓生)들이다. 이들은 모두 시서화(詩書花)에 능하여 선비들과 풍류를 논함에 부족함이 없었고, 그들이 남긴 시(詩)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현대 교과서에 실려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들이 진정한 미인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그녀들의 아름다운 행실과 마음 때문이다. 평양 미인 계월향은 임진왜란 당시 평양성에 침입한 왜장(倭將)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며, 진주 기생 산홍(山紅)은 을사오적(乙巳五賊) 중 한 명이 천금을 주며 첩(妾)으로 삼으려 하자 단호히 거절한 의기 높은 인물이다. 또한 청주 미인 매창(梅窓)은 의병장 유히경을 사모하며 평생동안 수절하는 높은 절개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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