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광사는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 1158-1210)이 생애의 마지막 10년을 보낸 곳이며 그 뒤로도 16명의 국사를 배출한 대표적인 승려들의 도량이다. 아마도 지금까지 국사 제도가 이어진다면 법정 또한 그 반열에 오르지 않았을까? 다음 번 다시 송광사에 가면 절 경내 곳곳에서 지눌과 법정의 자취를 느끼게 될 것 같다.

당시 고려는 무신들이 정권을 잡았고, 힘 있는 승려들은 정치세력과 야합하여 자기 휘하의 승려들을 정변에 동원하기도 하였다. 지눌 철학은 이러한 사회 혼란을 바로 잡겠다는 데서 출발하였다. 지눌이 깨달음을 한 단계 높인 계기는 중국 선종을 이룩한 혜능의『6조단경』에서 ‘모든 것을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이지만 보고 들은 것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는 것 또한 인간’이라는 말을 읽고서부터이다. 그 뒤 뜻 맞는 승려들과 참다운 수도를 위해 정혜사(定慧社)라는 단체를 만들고 소극적인 은둔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보살행의 실천자로 살았다. 그리고 42세 때부터 송광사에 머물다 10년 되던 해 목욕재계하고 절 안 사람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 설법을 한 다음, 제자들의 질문에 하나하나 답한 뒤 앉은 채로 열반에 들었다.

지눌이 택한 선종은 교종과 달리 경전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해탈이 달이고 경전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한데도 멍청한 놈들이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종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경전에 얽매이지 말라고 하였고, 스승과 제자 사이에 마음으로 주고받는 가르침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본래 선종은

선종과 관련된 일화는 많다. 나무로 깎아 만든 부처님을 한 겨울 도끼로 패서 장작을 만든 뒤, 놀라 야단법석인 사람들을 향해 ‘목불을 태워 사리나 얻어 보려 했다’고 한 단하스님의 행위는 상징을 우상화하는 대중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임제종에서는 진리가 어디 있느냐고 묻거나 진리를 어디서 구할 것인가를 물으면 질문한 사람에게 욕을 하고 호통을 쳐 댔으며, 덕산종에서는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 바로 그 고함과 몽둥이질이 내 밖에서 진리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에게 자신에게로 눈을 돌리도록 하는 가르침이었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부처가 되겠다는 마음을 갖는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마음 자체가 욕심이다. 머리에 부처는 이런 존재라고 그려 놓고 자기가 규정한 그 부처가 되려고 애쓰지만, 그런 생각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내 밖에 부처를 만들어 놓고 나와 부처를 대립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부처와 내가 하나가 될 수 없다. 지눌은 이런 생각을 가리켜 어둠을 움켜쥔 채 밝아지려 애쓰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렇게 깨달아 가는 과정의 첫 단계가 ‘돈오(頓悟)’이고 둘째 단계가 ‘점수( 漸修)’이다. ‘돈오’는 자기 마음이 부처임을 문득 깨닫는 것이며, ‘점수’는 끝없이 일어나는 욕망을 가라앉히는 과정이다. 지눌은 ‘점수’가 필요한 까닭으로 물과 얼음이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도 얼음이 바로 물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여러분은 진짜 바다를 본 적이 있는가? 하얀 파도가 밀려오기도 하고 출렁대기도 하는 모습은 바다의 참 모습이 아니다. 물결이나 파도는 바람이나 인력이 일으키는 작용이며, 바람이나 인력은 바다 밖에 있는 요소이다. 만일 우리가 바람과 인력을 다 끊어 버린다면 바다의 참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종이 한 장 깔아 놓은 것처럼 아무런 움직임도 소리도 없는 상태가 될 것이다.

본래 ‘돈오’와 ‘점수’는 중국 선종의 수양법이었으며, 남종은 ‘돈오’를 북종은 ‘점수’를 주장하였다. 그런데 지눌은 남종과 북종을 하나로 합치고, 다시 그 위에 교종을 합쳤다. 지눌은 부처가 입으로 전한 가르침과 마음으로 전한 가르침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교종과 선종을 합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조계종이 바탕은 선종이면서도 경전을 중시여기는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지눌의 철학에서 온 것이고, 이러한 지눌의 철학은 원효의 합침의 철학에서 왔다.
지눌은 이 같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마음을 비우라고 한다. 마음을 비우면 참답게 사물을 볼 수 있는 지혜가 생기며, 이 지혜로 사물을 볼 때 좋고 나쁜 분별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어느 해 부처님 오신 날 성철스님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법어를 발표한 적이 있다. 집착을 가지고 보면 저 산은 싫고 이 산이 좋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산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집착 없이 보면 이 산은 이 산일뿐이고 이 물은 이물일 뿐이다. 그래서 성철은 다음 해 법어로 ‘학교에서 공부하는 부처님들, 공장에서 일하는 부처님들, 교회에서 기도하는 부처님들’이라고 했던 것이니 부처의 눈에는 모두 부처인 셈이다.
마음을 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도 나를 버려야 한다. 이해관계에 얽매이면 사물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지만 나 자신을 버리면 참다운 눈이 열린다. 그래서 지눌은 남을 위하는 일이 바로 자기를 위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불교에서는 그러한 눈을 혜안이라고 부른다. 역사를 보면 민족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승려들이 무기를 들고 싸우기도 한다. 살생을 금하는 불교에서 승려들이 살생을 해도 되는가? 자신의 마음을 비웠을 때 정말 선한 존재와 악한 존재를 가릴 수 있으며, 그 속에서 참다운 보살행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전통은 1980년대 민주화투쟁 중 스님들이 거리로 나선 일에 대한 설명으로도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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