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 속 성경이야기 3> 이집트로의 피신 The flight into Egypt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아기 예수는 헤롯의 영아학살을 피해 베들레헴에서 시나이 사막을 지나 헬리오폴리스까지 긴 여행을 떠났다가 나사렛으로 돌아온다. 성경은 이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짧게 전하고 있다.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롯이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롯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마태복음 2:13-15)
안니발레 카라치 [이집트로의 피신] 1603년, 캔버스에 유채, 122cmx230cm, 갤러리아 도리아-팜필리, 로마
갓 태어난 아기와 산모가 거친 사막을 지나야 하는 일은 죽음을 각오한 고난의 여정이므로, 인간이 된 예수가 겪는 최초의 고난이다. 또 이집트라는 장소는 예수와 모세를 이어주는 접점으로,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아기 예수는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으로 이끈 모세처럼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임을 유형학 (Typology) 적으로 암시한다.
9세기 카롤링거 왕조시대에 그려진 프레스코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이미지 중 하나인데, 나귀를 탄 마리아와 아기 예수, 이를 앞에서 끄는 요셉, 그리고 이들의 짐을 들어주는 시종이 나귀의 뒤를 따르고 있다. 여기서 나귀를 탄 마리아는 두 다리를 한 곳으로 모은 아마존 자세로, 마치 옥좌에 앉은 것처럼 보인다. 배경에 묘사된 성곽들은 성가족 일행이 헬리오폴리스 근처의 소티나(Sotina)에 도착했음을 나타낸다. 피신의 장면은 초기부터 이 작품에서처럼, 일관된 방향성을 지니는데, 이들이 베들레헴에서 이집트로 이동할 때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반면 이집트에서 나사렛으로 돌아오는 귀환의 장면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묘사된다.
[이집트로의 피신] 825년, 프레스코, 성요셉 수도원 교회, 뮈슈타이르, 스위스
배경에 그려진 흥미로운 기적들
질르베르투스 [생 라자르 도텡 대성당의 성서의 인물들로 장식된 기둥머리 : 이집트로의 피신] 12세기경, 조각, 주형, 파리 건축문화유산단지 소장
랭부르 형제 [이집트로의 피신] 1408~1409년, 채색필사본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중세의 조각가 중 유일하게 이름이 전해지는 질르베르투스(Gislebertus)가 조각한 것으로 알려진 오텅(Autun)의 주두조각은 나귀와 성가족과 배경의 나무만으로 매우 압축적으로 피신을 표현하고 있다. 배경에 등장하는 이 나무는 (야자수의 일종인) 종려나무로 [위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것으로, 피신 도중에 일어나는 기적이야기와 관련이 있다. 사막을 지나던 성가족은 물이 떨어져 가고 있었는데, 마리아가 종려나무를 발견하고 그 열매를 따고자 했으나 손이 닿지 않았다. 이때 아기 예수가 종려나무가 구부러지도록 명령하여 마리아가 열매를 딸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이 작품에서 마리아의 왼손에 그들의 목을 축여준 종려나무열매가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이 작은 조각에 묘사된 이들의 표정은 여유롭다. 또 랭부르 형제(Les frères de Limbourg)가 15세기 초에 그린 필사본에는 성가족이 이집트에 도착하자 이교도들이 세운 우상이 붕괴되어 떨어지는 기적과 성가족을 인도하는 천사가 묘사되어 있다. 떨어지는 파편에 혹여 아기 예수가 다칠까 그를 감싸 안은 마리아의 모습과 놀란 듯한 아기 예수의 자세는 당시 랭부르 형제가 추구했던 사실주의를 실감 나게 보여준다.
요하임 파티니르 [이집트로의 피신이 있는 풍경] 16세기 초, 패널에 유채, 17cmx 21cm, 왕립미술관, 안트베르펜
16세기 초, 플랑드르 화가, 요하임 파티니르(Joachim Patinir)의 [피신]은 피신하는 성가족보다 배경이 강조되어 보이며, 이 배경에는 두 가지 기적이야기가 함께 나타난다. 화면 맨 왼쪽에는 우상이 떨어지는 기적이 나타나며, 오른쪽 중경에는 밀밭의 기적이 그려져 있다. 밀밭의 기적은 [아라비아 복음서]에 전하는 이야기로 헤롯의 군사에게 쫓기던 성가족은 밭에 씨를 뿌리던 농부들을 지나게 되는데, 아기 예수가 그 씨앗 한 줌을 밭에 뿌리자 그 다음 날 아침에 수확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성가족의 행방을 묻는 헤롯의 군사들에게 농부들은 씨를 뿌릴 때 그들을 보았다고 말하여, 군사들은 추격을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일화이다. 외경이 전하는 기적 이야기는 피신의 내러티브를 문학적으로 풍성하게 만들어주었지만, 트렌트 공의회는 이러한 기적이야기를 첨가하는 것을 금지하여, 16세기 중반부터는 피신의 배경에 등장하는 기적이야기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17세기에 이르면 피신에 관련된 내러티브 보다 풍경에 더 초점이 맞추어진다.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의 작품에서는 더 이상 기적이야기나 천사가 등장하지 않는다. ‘인생’을 상징하는 나룻배만이 그들의 여정을 말해준다. 피신의 절박함이 느껴지지 않고, 보는 이는 마치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하다. 원경의 하늘과 산, 중경의 클래식한 건물들, 전경의 나무는 연극무대를 보는 듯 잘 짜여 있다. 이렇게 화가의 의도대로 계산된 풍경화, 실재하지 않는 풍경화를 '이상적인 풍경화(Ideal Landscape)'라고 한다.
고된 피신 중의 아름다운 휴식
제라르 다비드 [피신 중의 휴식] 1510년, 나무에 유채, 42cmx42cm, 내셔날 갤러리, 워싱턴
나귀를 타고 피신하는 장면이 동적이며, 긴장감이 서려 있다면, 피신 중 휴식을 묘사한 장면은 정적이며 평화롭다. 15세기부터는 피신 중 휴식의 장면이 자주 다루어졌는데, 특히 배경을 묘사하는데 자연의 풍경을 묘사하는 것이 화가들에게는 매우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었다. 1510년 제라르 다비드(Gerard David)가 그린 [피신 중의 휴식]을 보면, 멀리 원경에는 당시 플랑드르의 사실적인 풍경이 묘사되었고, 중경에는 막대기를 들고 가족의 허기를 달래줄 밤을 따는 성 요셉이 등장한다. 화면의 왼편구석에는 성모자를 태우느라 수고로웠을 나귀도 쉬고 있다. 아기 예수는 ‘그리스도의 피’와 ‘성찬식’을 상징하는 포도송이를 들고 있으며, 이들이 피신 중임을 암시하는 바구니가 발치에 놓여 있다. 이 밖에도 플랑드르 회화에서 즐겨 나타나는 숨겨진 상징(hidden symbolism)으로는 성모의 발아래 그려진 양치식물로 이들은 ‘겸손의 미덕’을 상징한다. 또 양치식물 옆에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하는 엉겅퀴와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세 잎 클로버도 함께 그려졌다. 당시 화가들은 마치 식물도감처럼 철저한 사실주의로 이러한 식물을 묘사하였다. 이 그림은 피신이라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자연 안에서 잠시 평화로운 휴식을 취하는 성가족을 아름답게 묘사했다.
오라치오 젠틀레스키 [이집트로 피신한 성 가족의 휴식] 17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157cmx225cm, 루브르 박물관 소장
무엇보다 이집트로의 험난한 여정 중에 성가족이 휴식을 취하는 큰 이유는 성모가 아기 예수에게 수유를 하기 위해서였기에 휴식의 장면에는 '젖 먹이는 마리아(Maria Lattante)'가 종종 등장한다. 17세기 로마의 화가 오라치오 젠틀레스키(Orazio Gentileschi)가 그린 [피신 중 휴식]은 피신의 모습을 극히 현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성가족의 금빛 후광은 사라졌으며, 성모는 여느 젖 먹이는 어머니가 그러하듯 사랑스러운 눈길로 아기 예수를 바라보고 있다. 성 요셉은 지고 있던 피난짐과 함께 고단함을 잠시 내려놓고 단잠에 빠져 있다. 맨발로 흙바닥에 앉아 있는 성모는 ‘겸손의 성모(Madonna Humility)’를 넘어서 마치 소외된 이웃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폐허가 된 벽 너머로 보이는 먹구름 가득한 하늘은 그들이 고된 피신 중임을 더욱 강조한다.
카라바지오 [피신 중의 휴식] 1596~1597년, 캔버스에 유채, 133,5cmx166,5cm, 갤러리아 도리아-팜필리, 로마
한편, 카라바지오의 [피신 중 휴식]은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VIII, 재위 1592∼1605)의 조카 피에트로 알도브란다니가 주문한 것으로 등 돌린 천사를 화면 가운데에 배치한 그 구도가 파격적이다. 화면의 축을 이루는 천사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왼편의 요셉은 악보를 들고 있고, 성모는 아기 예수를 꼭 안아 재우며 금발머리의 아기 예수에게 머리를 기댄 채 졸고 있다. 요셉은 봇짐을 깔고 앉은 맨발의 농부로 묘사되었고, 그의 손이 닿는 곳에는 포도주병이 있다. 특히 요셉이 들고 있는 악보는 플랑드르 악파(Flemish school), 노엘 볼더웨인(Noël boulderwain)의 곡으로 [아가]를 주제로 한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란 마드리갈(madrigal)로 확인되었다. 또 카라바지오는 요셉이 앉아 있는 거친 땅과 대조를 이루어 마리아 주변에는 떡갈나무를 비롯하여 여러 관목들, 엉겅퀴와 우단담배풀로 자생적인 '닫혀진 정원(hortus conclusus)'을 만들었다. 마치 자장가를 들으며 엄마 품에서 곤히 잠든 아기 예수를, 카라바지오는 6살에 페스트로 아버지를 잃고 의지해오던 어머니- 그의 어머니도 19살에 세상을 떠났다.-의 품을 그리워하며 그린듯하다.
* 닫혀진 정원 중세에 나타난 마리아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아가 4장 12절의 “그대는 닫혀진 정원,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그대는 닫혀진 정원, 봉해진 우물.”에서 유래했다.
글 : 정은진 / 문학박사, 서양미술사 중세 및 르네상스 미술사 전공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서강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가르친다. 출처 : 50-70대의사랑과 추억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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