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린 시절에도 나름의 추억이 많았다.
그중 유독 어떤 공간에 대한 기억들이 많은데, 내가 살던 서울 성북구 정릉의
아래 동네에는 말 그대로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있었다. 그 밑둥치 뿌리사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고 심재부분이 삯아 없어져 작은 체구였던 초딩들은
그 구멍으로 들어가서 하늘로 뻥 뚫린 나무속을 양 다리와 팔을 벌리고 버티며
오를 수 있었다. 그 안은 포근했고 위로 올라가 작은 가지 위에 앉으면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었다.
木上住宅 또는 TREE HOUSE라 할 어릴 때 보았던 타잔에 나오는 나무 위의 집과
넝쿨로 엮은 구름다리, 줄에 매달려 이동하는 모습은 너무 신기하고 부러워
나도 그런 비밀스런 공간, 나만의 아지트를 꿈꾸었는데 그래서 자꾸만
나무위에 올랐는지도 모르겠다. 이 빛바랜 사진처럼 말이다.....
나는 이처럼 은밀하고 아늑한 공간을 꿈만 꾸었지만 내 아이들에게는
현실로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어린시절 나무타기를 잘 했던 나는 방과 후엔 가방을 맨 채 어김없이
청수장으로 향했고 그 계곡에서 멱도 감고 나무에도 올랐다.
봄에는 주로 아카시아나무위에 올라가 코끝을 스치는 아카시아 꽃향기에 취했고
가을에는 허리에 빈 병을 차고 나무위에 올라가 버찌를 가득 담아 내려오곤 했는데
작고 어린 내가 내 키 몇 길 높이의 나무위에서 바라보는 ‘다른 시각’은 분명히
특별한 세계였고 그 자체가 신비한 추억이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마녀배달부 키키’에는 화가 지망생인
명랑 씩씩한 소녀가 혼자 살고 있는 숲속의 통나무집이 등장한다.
지브리표 배경의 특징인“햇살이 반짝이고 그 아래 그림자가 일렁이는 섬세함”에
세계 최고라 평가받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미술팀답게 풀나치 통나무집의 외형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표현하였다.
“U"그루브로 단정하게 쌓아올려진 통나무의 단면을 보라.
십년 전 내가 꿈꾸었던 집은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아래층엔 넉넉한 주방과 아담한 거실, 부부침실과 화장실 그리고 이층에는 삼남매가
어린시절 추억을 만들어갈 지붕 낮은 다락방 두개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바람 선선한 가을 오후에는 납작한 데크 위 테이블에서 아내와 커피를 마시고
겨울이면 난로 주위에 모여 앉아 책을 읽거나 이야기를 할만한 그런 적당한 공간,
아이들이 커 가면 별채를 지어 늘이거나 바로 집에 잇대어 확장하면 되겠지.
집 한편 커다란 나무 위에는 사다리로 오르고 줄을 타고 내려올 수 있는 자그마한
아지트가 있고 그 아래에는 그네를 매달아 둘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간절하게 원했던 시기에 그 꿈은 허락되지 않았고 대신 남의 집을 짓는 일,
그것도 통나무건축이 나의 업이 되었는데 이처럼 이어지고 결정된 운명의 의미를
나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왠지 내게 좋게 작용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고 또 나는
그런 운명의 힘을 굳게 믿는다.
나는 다시 간절하게 원하고 있다. 아마도 운이 좋다면 둘째와 막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아빠의 소원이 이루어 질 것이다. 나는 이제 십년 전과는 많이 다른
형태와 규모의 집을 계획하고 있는데 그 당시와는 상황이 그만큼 달라졌기 때문이다.
나는 통나무건축인이 되었고, 통나무건축가의 길을 가고 있다.
큰딸이 고딩이어서 마음이 급하기는 하지만 이왕에 흘러간 세월은 되돌릴 수 없다.
대신 그만큼 값진 시간을 보내면서 철저하게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에 적어도
나와 내 식구들이 살 집만이라도 대를 이어 물려주고 살아갈 그런 집을 짓고 싶다.
누구든 쉽게 세대의 단절을 말하지만 나는 물리적인 면뿐만이 아니라 철학적인
의미의 “집”을 통해 세대가 서로를 기억하고 이어지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욕심이라 하겠지만 말이다.
나와 아내와 아이들이 살던 집에서 내 아이들의 아이들이 살아가며 아버지와 어머니,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표정과 목소리와 습관과 함께 나누었던 일들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며 다시 그들의 아이들에게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살아온
세월을 들려줄 수 있는 흔적이 집안 곳곳에 남아있는, 그렇게 세대를 이어줄
단단한 집과 그 집에 생기를 불어 넣어줄 삶을 살고 싶다.
우리 사회의 아이들에게 집은 곧 아파트라는 ‘소비재’로 인식되는 현실에서
‘집의 연속성’그리고 유년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내왔던 ‘집에 대한 추억’처럼
철학적인 태도를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행복하지 않은가 하는 지적을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많은 것들은 여전히 우리들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학창시절에 암송했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을 길>처럼.....
내가 생각하는 집은 ‘깔끔하고 고요’해서 조심스러운 장소가 아니라
번잡하고 시끄러운 곳이다. 아이들이 학교생활에 지친 몸으로 늦은 시간에 귀가해
잠만 자는 곳이 아니라 집 안팎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노는 곳, 엄마와 아빠가 함께
식탁을 준비하고 온 식구들이 같이 밥을 먹으며 이야기 하고 청소하고 하는 그런
“살아있는”집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하여, 그렇게 이어질 “세대의 삶”을 담아 낼 참 좋은 집을 지을 것이다.
<어떤 사람의 소박한 통나무집 설계이야기에서...>
secretgarden - poe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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