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오래된 중세마을 체스키 크룸로프도 바로 그런 '존재의 빛'을 곰씹어보게 하는 장소다. 저 높은 곳에 쉽게 오르지 못할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향해 경주마처럼 질주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이 이미 존재하는 크고 작은 빛들을 세심하게 보살피며, 세상의 빛에 내 자신의 영혼을 조율하는 삶, 저 머나먼 곳에 존재하는 빛을 억지로 옮겨 내 것으로 소유하려는 삶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있는 빛을 세상의 빛과 조율하며 살아있는 모든 빛들과 공생을 꿈꾸는 삶. 그런 삶의 태도가 없다면 이토록 아름다운 중세도시는 개발의 광풍에서 무사히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체스키 크룸로프는 수백 년 동안 누군가의 할아버지, 누군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일궈냈을 삶의 온기와 흔적들로 그득하다. 그 내면의 빛을 발견해내고 그 빛을 포착하는 것은 최첨단 카메라가 아니라 보는 사람의 해맑은 영혼일 것이다. (198p)
주말에 정여울 작가의 책을 읽다가 그녀가 '중세마을 체스키 크룸로프'를 여행하고 쓴 부분에 눈이 멈췄습니다. 1992년에 마을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체코의 숨겨진 보물이라는 곳입니다.
중세마을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아기자기한 골목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기념품을 파는 예쁜 가게들이 많아서 값진 물건을 저렴한 가격에 찾을 수 있었다고 썼더군요.
1996년 초, 동구유럽과 옛 소련연방에서 탈퇴한 나라들을 자동차를 타고 천천히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동구 유럽에 개방의 물결이 아직은 큰 변화를 만들기 전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그랬을 겁니다. 어느날 체코의 한 마을에 들렀는데, 이전에는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묘한 기분이 들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마을의 중심인 조그마한 광장에 들어섰을 때, 그 광장을 둥그렇게 둘러싼 오래된 석조건물들이 돌로 만들어진 광장바닥과 어울어져 마치 중세로 막 들어온듯한 기분이 들었지요. 소설책이나 역사책에서 읽었던 중세 유럽에 대한 텍스트가 그 마을의 광경과 만나면서 '나만의 중세 이미지'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중세 유럽의 모습이 이랬을 것이라는 상상에 빠지며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행은 우리를 무장해제시키고, 우리 안에 내재해 잠자고 있던 촉수들을 깨워줍니다. 2010년대 동구유럽의 작은 마을들은 많이 변해있을까요.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공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