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Jean Desire Gustave Courb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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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의 은신처, Plaisir Fountain, 1866
샘[泉], The Source, 1868
The Wave, 1870
오르랑의 큰 떡갈나무
부상병 The Stone Breakers, 1849, 돌깨는 사람(1849년. 2차 대전으로 파괴)
해머를 두드리는 나이든 오른쪽 인물과 돌덩이들을 힘써 들어 올리는 젊은 남자는 시선을 돌린 채묵묵히 자신의 일에 열중하고 있다. 화면을 꽉 채운 인물들의 단순한 윤곽선과 거친 듯한 무채색의 표면으로 인해 화면에 바짝 다가선 두 인물의 현장감은 더욱 고조된다.
오늘날 우리들이 보기에 이 그림에는 '건강한 노동의 모습'이라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사회적인 메시지 가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그림이 1850-51년 살롱에 출품되었을 당시에는노동자의 모습을 화면에 당당하게 그렸다는 것만으 로도 큰 문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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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f-portrait with black dog, 1842
Gustave Courbet - Ophelia 1842
Zelie Courbet, 1847
The Meeting ("Bonjour, Monsieur Courbet"),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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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rellis, 1862, Toledo Museum of Art, Toledo, Ohio
The Lake Neuchatel, 1875
![]() 구스타브 쿠르베는 스위스의 국경에서 가까운, 프랑스 동부, 오르낭에서 그는 왕립 중학교와 브장송 미술대학을 다닌 뒤, 1841년 명목상으로는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에 갔다. 그러나 그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대가들의 그림들을 연구하는 데 더욱 진지하게 몰두했다.
데리고 있는 쿠르베(Courbet with a Black Dog)" 로 마침내 25세가 되던 1844년에 왕립 아카데미의 후원으로 당시 프랑스에서 해마다 열리는 유일한 공공 미술 전람회인 살롱전에 입선했다. 근본적으로는 당시의 고전주의와 같은 이상화나 낭만주의적인 공상표현을 일체 배격하고 ‘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묘사할’ 것을 주장한 그의 사상적 입장은, 그는 고대의 신들을 모두 추방한 자리에 당대의 평범한 일상을 들어앉히고, 거의 사진에 가까운 정직함으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화폭에 담았다. 그가 그린 누드들을 보면 미끈하게 잘 빠진 여인이 아니라
71년 파리코뮌 때, 나폴레옹 1세 동상의 파괴 책임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 후 스위스로 망명하여 객사하였다.
Isao Sasaki - Opheli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