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상 선생님 책에서 퍼옴/그림이란 무엇인가?
그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그려서 보여 주려는 것이다. 즉 표현(表現)하는 것이다. 그냥 베끼는 것이 아니다. 생각이나 느낌을 진짜배기로 그리는 것이다, 남이 아닌 자기가. 진솔한 나의 표현이다.
큰 것을 작게, 없는 것을 있게, 있는 것을 없게. 다시 말해서 경물을 취사선택하여 그리는 것이다. 그냥 있는 것을 옮겨 그리는 것을 재현이라 한다면 수많은 경물 중 꼭 필요한 것만을 취사선택하여 주관이나 창작성을 가미한 것을 표현이라 한다.
그림은 표현되어진 것을 말한다. 물론 주관적인 사고로 대상을 재해석 하는 것이다. 예술이 모방과 상상과 상징과 쾌를 즐겨 쫓듯 그림도 예외는 아니다. 그림 속에 내포된 작가의 사유는 위의 모두를 함축, 뚜렷한 주제로 표현된다.
예를 들어 사과를 그렸지만 보는 사람마다 모두 '사랑'으로 해석되어 진다면 그림의 주제는 사랑이고 또 사랑을 그렸다 할 것이다. 그때의 사과는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소재가 된다.
작가는 소재를 선택하여 극적인 상황으로 몰고 간다. 그래야만 감상자는 상상과 상징성을 총동원하여 감동을 키우기 때문이다.
극적인 상황은 사건과 사건이 극적으로 만나게 되었을 때 쉽게 발생한다. 그림에서의 사건이란 소재와 소재의 만남이나 화면의 분할, 명암이나 색상의 대비 등을 말하는데 작가는 그 사건을 극대화 시키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표현된 그림은 화가의 상상, 사상 등을 회화적 수단한 총동원하여 평면상의 화폭 위에 표현한 것이다. 그때 비로소 그림이 되는 것이다.
거기에서 품격이 높다, 감각적이다, 쉽게 즐거움을 느낀다 등 감상자에게 무한한 상상력이나 감정을 이입시켜 창작품에 참여토록 마음의 문을 열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림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언어가 되고 그 언어는 만인에게 공통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한다. 누구에게든 쉽게 전달되는 미적 쾌감(美的 快感). 그것이 명화(名畵)가 된다. 다빈치의 모나리자의 미소가 신비롭게 보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러나 도대체 해석이나 이해가 되지 않는 그림도 많다. 쉽게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다. 소련어를 모르는 자에게 소련어로 얘기한다면? 비구상회화는 그 중의 하나다. '아름답다' '우아하다' '청순하다' '신난다'는 개념들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하자. 그것은 구상적 회화 요소로 부적합하다. 그래서 비구상으로 그런 개념들을 표현한다.
넓은 횐 캠퍼스위의 ‘까만 점 하나’와 ‘고독한 나’는 상관을 지을 만 하다. 일반적으로 느낌이나 감각으로 받아들여지는 미적 정서를 언어로 표현하기는 힘들다. 위의 까만 점을 '원죄'로 명명해도 이상할 바 없다.
그래서 가능하면 회화의 미적 영역에 동참하더라도 판단을 유보하던가, 해석을 금지하고 그냥 느끼는 대로 보이는 대로 감상하면 그만이다. 아까 그 까만 점을 보고 '시원하다'고 느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면 소련어를 모르더라도 몸짓으로, 이심전심으로 의사소통이 되듯이 비구상 그림도 접근하기 쉬워진다. 따라서 그림은 가능하다면 비교우위평가보다는 절대평가를 요구한다.
그림 !
작가가 자기의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하되 회화적 기호로 표현하는 것이 그림이다.
한 교실에서 50명이 의자를 그렸다 하자. 모두 다 다르게 그린다. 그것이 미술이다. 색상도, 모양도, 크기도 주관에 따라 다르게 본다. 모두 달리 표현된다. 사진처럼 닮게 그린 것을 잘 그렸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그림이다. 그러면 무엇이 달라지고 있는가?
작가가 보는 통찰(洞察)의 눈이란 게 있다.
‘Insight’
화가는 의자가 갖는 속성이나 특징을 묘사하되 화가의 번득이는 영감(Inspiration)과 통찰의 눈으로 다시 살핀다. 즉 속을 들여다본다.
하늘에 떠있는 의자, 다리가 3개인 의자, 의자에 앉은 개미보다 작은 거인, 책상에서 늘어뜨린 의자 등, 화가는 제 마음 내키는 대로 직관(Intuition)과 상상력을 동원한다. 그래서 화가에 따라 불안한 의자, 의외의 효과, 상상의 의자, 큰 의자 등으로 변한다.
색상도 빨강 의자, 파란 의자 등 천차만별이다. 뿐만 아니라 다리가 늘어뜨려지고 휘어진 모양 등으로 왜곡(Deformation)되면서 자기 해석으로 재창조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엄격한 의미에서 작품은 지극히 주관적이기 때문에 감상자에 따라 달리 해석되어지기 쉽다. 여기서 변하지 않는 보편성은 '조화와 통일'이다. 좋은 작품은 모든 게 잘 조화된 그림이다.
그림은 그렇게 주관적이면서 미적 보편성도 가진다. 자기의 감정이나 사상을 감상자에게 멋있게 동참시키려고 여운이나 매력을 불러들인다. 흔히 그림에 끌리는 것은 바로 이런 매력 때문인데 화면을 장악하여 공감대를 갖도록 화가는 정서를 유보한다.
훌륭한 화가는 감상자가 보면 볼수록 새로운 자극을 받도록 화면에 긴장감을 불러 넣는다. 상징 ·은유 ·갈등의 형식이나 색상 ·명암 ·대비 등에 신경을 쓰며 구성을 한다. 더러는 그대로, 즉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감상되도록 판단을 관자(觀者)에게 내어 맡기는 화가도 많다.
확실히 그림은 논리적 판단의 사유물(思惟物)은 아니다. 적어도 그림은 감각적이며 정서적이며 사유적이다. 논리적 사고에 앞서 있는 그대로의 가치를 판단케 하는 비논리적 사유의 사물이다.
그러나 느낌 ·감정 ·정서로 표현되어지는 그림의 속성은 일단 '보여져야' 한다. 잘 보임은 주위 환경, 관자의 판단, 전시장의 시설, 선견지식에 따라 달리 판단되므로 위의 모든 것을 떠난 순수한 직관에 의한 화가의 심상(心想)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어렵다. 즉 그림을 보는 통찰력이 필요한 것이다. 작가의 통찰력을 읽을 줄 알아야 참다운 감상자가 될 것이다.
2만년 전 구석기 시대에는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 원시인들은 애니미즘에 의한 주술적(呪術的)인 그림-들소 등 들짐승을 그렸다. 그것이 그림의 시발이다.
동양화는 12세기 송나라 때 화선지에 예술성을 나타냈다. 15세기 유럽 반아이크 형제는 유화물감을 사용하여 그렸다. 서양화는 인물 중심, 동양화는 풍경 중심의 그림이 지역 특색상 그려졌다.
그림은 소재에 따라 인물화 ·풍속화 ·환상화 ·신화 역사화 · 종교화 · 풍경화 · 정물화 · 풍자화 추상화 · 일러스트레이션 등 다양하다.
동양화는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고 자연을 모태로 하여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그림을 그리고 천지인 합일(天地人 合一)의 조화를 목표로 한다면 서양화는 인물 중심의 합리적이고 투시도적인 시각에 의한 그림에서 왜곡과 생략과 강조로 새로운 조형적 형식을 찾는 개성과 조화를 목표로 한다.
한마디로 동양화는 무(蕪: 無我一如))에서 시작하고 서양화는 유(有:存在)에서 시작한다.
동양화도 그 내용과 방법에 따라 문인화 · 사군자 · 수묵화 ·채묵화 · 채색화 등이 있다.
그림은 그 재료에 따라 파스텔화 콘테화 수채화 과슈화 · 유화 · 프레스코화 · 템페라 스테인드글라스 · 모자이크 · 유리화 등이 있다.
그리는 방법에 따라 꼴라쥬(붙이는 그림), 프로타쥬(문지르기), 마블링(기름 띄우기), 데칼코마니(색겹쳐 문지르기), 극사실, 오브제(物), 판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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